내 삶을 끝낼 권리 - 안락사

에세이 2020. 2. 7. 05:53

네덜란드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르셀 랑어데이크(48)는 그의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책으로 발간했다.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아래 링크된 기사는 책 저자 마르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699631

 

결국 동생 마르크(44)가 내린 결론은 책 제목과 같다. 하지만 그의 경우는 조금은 특이한 케이스였는데, 네덜란드는 2002년 안락사를 법으로 인정했지만 대체적으로 육체적 고통의 호소가 안락사 인정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정신적인 고통이었고 알코올 중독이 주된 원인이었다. 네덜란드 내에서도 이런 정신적인 이유로 안락사가 허용되는 경우는 전체의 1%수준.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닌 것이다.

 

마르크가 처한 꼭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환경이 알고 싶었다. 동생 마르크는 과연 불행하게 살았을까? 본인 입장에서는 꽤 불행했을 것이 뻔할 테고 그의 일기를 본 그의 형 마르셀도 그 고통과 불행에 공감했다. 하지만 제삼자가 보는 관점에 있어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마르크는 꽤 좋은 차, 사우나가 딸린 멋진 집, 그리고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행복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사실 당장 우리 주변만 돌아봐도 오늘 하루 끼니 해결이 어려줘 죽음을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르크가 처한 고통을 선뜻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배부른 소리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저마다 다른 이유들도 세상을 등지고 싶은 이들은 항상 존재한다. 꼭 죽음의 이유를 재산의 유무로만 따져서는 안 될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국가는 언제까지 그들을 '무조건 살라'고만할 것인지 묻고 싶다. 살아서 순순히 해결될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자살예방센터나 자살방조죄 같은 것을 만들어 어떻게든 자살 방지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그 것이 정답일까? 




누군가에게는 지금 사는 세상이 달콤한 상을 받는 기분일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벌을 받는 기분일 수도 있다. 고통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벗어날 생각 말고 더 고통 속에서 지내라고 한다면 그것이 '인본주의(人本主義)'이고 휴머니즘일까?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중에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리'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아도 방법은 늘 있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해하는 바로 그 방법이다. (그 단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이 글이 그것을 유도하겠다는 취지가 아닌 터라 쓰기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 극단적인 방법을 쓴다면 사회적인 파장이 크다. 미리 알리고 양해를 구하지 못한 주변인들의 충격도 상당할 것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것을 발견했거나 수습하는 사람 또한 오랫동안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만약에 잘 알려진 유명인일 경우는 베르테르 증후군으로 인해 잇따라 세상을 하직하는 이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에서 여견만 잘 마련해준다면 최소한 주변인들에게 마지막 인사할 시간을 벌어주기도 하고, 가족 품에서 편안하게 세상의 하직을 맞이할 권리도 줄 수 있다. 그 누구도 피로 얼룩진 잔인한 현장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장점이다.

 

마르크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부모와 찍은 사진


작년 3월 6일의 뉴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인용한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402664

5일(현지시간) 국제적으로 안락사를 돕는 스위스 비영리단체 디그니타스(DIGNITAS)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16년에 1명, 2018년에 1명 등 모두 2명의 한국인이 이 기관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밝혔다.  
중략 
서울신문에 따르면 이미 숨진 2명 외에 향후 해외 안락사를 준비 중이거나 기다리는 한국인도 107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그니타스와 엑시트 인터내셔널에는 각각 47명, 60명의 한국인 회원이 있어 이들 107명이 향후 안락사를 신청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기사처럼 꼭 스스로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결국 가능은 하다는 것이다. 스위스까지 날아가야 하기에 편히 죽는 방법에서도 빈부격차가 느껴지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재력이 된다면 안락사를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단 마르크처럼 정신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라면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아직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소극적인 방법만 가능한 국내 사정에 비추어 보자면,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는 아직 네덜란드의 사례처럼 정신적인 이유로도 안락사를 선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해도 자의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가사상태에 이르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아직은 너무 시기상조의 바램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도 더욱 더 폭넓은 기준으로 안락사를 허용해 주었으면 한다. 꼭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 들리면 과연 고통이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먼저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들 한번은 치러야 할 의식인데 고통없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 만큼 축복된 것이 없다는 생각을 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의문으로는 그의 죽음이 그의 삶에 있어 '복'인지 '화'인지 궁금해했다. 되도록이면 화가 아닌 복이길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