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음악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인해 일본문화가 국내에서 수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야 일본의 문화개방을 허락했고 하나씩 일본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90년에 후반이었다. 영화 및 비디오가 먼저 수입되었고, (그 즈음에 유명한 영화 '러브레터'도 상영되었다) 음악에 있어서도 빨리 개방이 되길 원했지만 일본어가 안 들어간 연주곡 위주로 수입이 진행되었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우리나라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도 이 때쯤으로 기억한다. 최종적으로 전부 개방된 것은 2004년이다.


그 당시에는 '왜색'이라는 말을 써가며 일본 문화에 대한 반감이 있던 때였다. 반일 감정을 가진 국민 정서도 당연히 이에 한몫했다. TV에서 조차 일본말을 들을 수 없었고 (EBS에서 교육용으로겨우 들을 정도?) 얼핏 일본 연예인들이 TV에 잠깐 얼굴이 비출때면 내 마음까지 콩닥거렸다. 심의에 걸려서 다음번에 사과방송을 할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주제에 빗나가지만 잠깐 회상에 잠겨보자면, 이렇게 일본문화를 감춘 탓에 부작용이 발생되기도 했다. 여러분야에서 일본 문화 표절이 많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가요에서도 말이다.


결국 왜색이 약하다고 생각되는 '러브레터'같은 잔잔한 영화부터 문화개방은 시작했다. 아마도 당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른바 왜색짙은 X-JAPAN 같은 밴드가 국내문화를 점령하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 아닐까?


<엑스재팬, 멤버 '히데'의 사망은 국내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일본음악이 정식 수입되지 못하였던 탓에 듣고 싶었던 음반이 있으면 찾아가던 곳이 두 곳이 있다. 


1. 서울 명동에 있던 중국 대사관 앞 모여있는 상점들

2. 인천 동인천역 지하상가에서 암암리에 영업하던 레코드가게


당시 홍콩,대만에서는 일본음악이 수입되고 있었기에 중화권으로 정식수입된 일본 음반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명동에 있는 중국대사관 앞까지 가야했다. 그 앞에 중국물건들을 파는 가게들에게서 음반을 구할 수 있었다. 당연히도 일본어는 노래 제목에 밖에 없고 대부분 중국어다. 그러나 난 중국어, 일본어를 둘다 못하므로 이러나 저러나 크게 개의치 않는다.


또한 동인천 지하상가에 일본음악을 몰래 파는 한 가게가 있었다. 거긴 한번 밖에 가본적이 없다. 일반 정식 수입된 음반보다 2~3배 덤으로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물론이다. 이 두 가게의 행태는 모두 불법이다.


당시 좋아하던 대만 여가수가 있어서 사진 몇장 같이 사올 요량으로 명동으로 자주갔다 (당연하게도 고백한번 못해보고 아쉽게 마음을 접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일찌감치 카세트 테이프가 퇴물 취급되어 시장에서 사라진 탓에 테이프로 음반을 구하려면 명동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시 CD플레이어가 없었다. 지금도 없다. 생각해 보니 가져본 적도 없다. 왜일까?)


90년대 중후반까지도 일본음악은 중화권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클론'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중화권 진출로 인해 인기가 하락세를 맞고, 일본음악이 차지하던 음악차트는 빠르게 우리나라 음악으로 바뀌게 된다. K-POP이 J-POP보다 음악적으로 우수해서가 아니다. 당시만해도 J-POP이 훨씬 고급스러웠다. 중화권에서는 자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없던 새로운 형태의 댄스음악에 홀려버린 것이라 생각된다. 그 즈음에 나는 항상 홍콩 위성채널을 보면서 '저기에 국내 음악을 수출하면 대박나겠다'라는 생각을 늘 했었다. 그 것을 내가 하겠다고 생각했으나, 몇달 지나지 않아 이미 누군가가 시작했던 것이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뭘 할 수도 없었다.


테츠야 코무로 (Tetsuya Komuro, 이하 TK) 얘기한번 하기 힘들다. TK는 국내음악이 중화권에서 득세하기 전, 일본음반이 우리나라에 개방되기 전 J-POP을 주름잡던 유명한 프로듀서다. 아마도 일본음악의 전면개방이 10년만 일렀다면 우리나라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TK가 직접 멤버로 참여했던 그룹 'globe', 몇년 후 이 여성멤버와 부부가 된다>


95년에는 4년 연속 프로듀서한 곡이 레코드 대상을 수상하고 96년 오리콘 싱글 차트에 프로듀스 곡이 톱5을 독점, 96년에는 globe의 앨범이 당시 오리콘 차트 기록을 갱신하는 400만장 이상을 기록. 아무로 나미에의 곡도 300만장을 뛰어넘는 등 코무로 패밀리는 폭발적으로 리즈 시절을 맞게 되었다. 이로 하여 97년엔 세금만 11억 7천만엔을 내고 고액 납세자 전국 4위에 이르렀으며 TK가 프로듀스한 음반의 총 판매량은 1억 7천만 장에 이른다. 내가 TK를 알았을 때는 이미 이렇게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아래는 '코무로 패밀리'로 불리는 그가 프로듀스한 가수들 또는 그의 곡으로 히트 친 가수들이다.


TRF

시노하라 료코

globe

아무로 나미에

카하라 토모미

hitomi

스즈키 아미

하마다 마사토시

dos

Kiss Destination

tohko

미쿠 레이카(未?玲可)


내가 관심있는 것은 TRF,globe,아무로 나미에였다. 사실 나머지 가수들은 잘 모른다. 나는 J-POP을 많이 안다고는 할수 없는 것이 내가 종종 듣는 J-POP 가수는 열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 즈음에 미국 팝 음악이 힙합으로 재편되기 시작하면서 미국 팝 음악에 대한 흥미를 어느 정도 잃었기 때문에 J-POP에 관심을 더 두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빠삭하다' 싶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그랬을 것 같은데, 영어권 거주자도 아닌 사람이 4마디 단위(심하면 2마디)의 별다른 감흥도 없는 코드의 조합으로 노래 시작부터 끝까지 랩만 해대는 것을 듣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이 것이 유행을 타면서 너도나도 할 것이 정말 성의없는 반주위에 랩을 얹기 시작했다. 당시 내 스승은 '약에 취해서 만드는 음악들'이라고 규정했다. 사실 지금도 그런류의 힙합음악들은 걸러듣곤 한다. 물론 아주 편향적인 시선인 것은 인정한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전성기 시절의 아무로 나미에 'Walk in the park'>


종종 TK는 국내의 김창환과 비교되기도 했다. 김건모,신승훈,박미경,클론 등을 키워낸 '그'였지만, TK의 아성에 근접할 정도는 아니었다. TK의 당시 영향력이라면 지금의 국내 3대 기획사의 영향력을 모두 합쳐야 가능할 것이다. 당시는 '코무로 붐'이라 불리며 하나의 사회현상을 만들어낸 정도니 어마어마 했던 것이다. 이후 아무로 나미에도 '아무라'라는 자신의 스타일을 일본내에 대유행을 시키게 된다. 


TK는 그 즈음에 3~4일에 한곡씩 만들어 냈다고 한다. 국내에서 보기에는 지금 들어도 지장이 없을 만한 음악성이었지만, 일본내에서는 차트를 거의 매번 독점하다시피하는 그에게 음악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비난하기도 했다.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으로 일본을 쥐고 흔들만큼의 영향력을 가졌다지만 3~4일에 한곡씩 찍어내야 하는 스케줄에서 자신의 음악성에 발전을 이루기는 무리였을게 자명하다. 만약 그런 상황에 나에게도 닥친다면 나 또한도 발전은 뒤로 둔 채 당장의 앞일 돌려막기에만 급급하지 않았을까?


그는 그런 스케줄에 지친 나머지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하기로 한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팝 아티스트에서 일렉트로니카로 노선을 전환하여 트랜스, 프로그레시브 록 등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그런 선언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대중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본인은 하고싶은 활동을 하기에 만족해 할런지, 아니면 수입이 많이 줄기에 후회하는지는 알수 없지만, TK역시 대중에서 멀어지며 결국 음악계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다 2008년 11월에 저작권을 이용한 사기 혐의로 체포까지 되면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이미지가 추락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사가 날 만큼 큰 사건이었다고 한다. 이후 은둔생활을 이어가던 중 과거 돈을 펑펑 쓰던 화려한 생활으로 유명했던 그의 통장엔 돈이 6259엔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재기를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다시 전성기는 돌아오지 못한채 영영 은퇴를 하게 된다.


'코무로 붐'에서 스스로 내려온 댓가는 상당히 컸다. 상상도 못할 만큼 부를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그는 없는 형편에 전과자까지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체포될 당시 그는 유니클로 저가티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벌어들인 돈만해도 어마어마한데 어쩌다가 이렇게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일까?


TK는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는 힘들어보인다.